#1.

 

1000가구가 넘는 인천 C아파트에 2011년 7월 경리 직원 A씨가 채용됐다. A씨는 일을 시작한 지 3주 만에 공금에 손을 댔다. 이사 가는 주민이 20일치 관리비를 미리 정산해 맡긴 41만1860원이었다. 이사 철인 9월이 되자 9가구가 맡긴 423만6900원이 A씨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A씨는 아파트 회계 프로그램엔 '결손 처리(돈을 받을 수 없다는 뜻)'로 입력했다.

 

↑ [조선일보]서울 한강변 아파트가 안개에 휩싸여 있다. 우리 국민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 1000만호(戶), 거주자 3000만명’ 시대가 몇 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연간 12조원이 넘는 아파트 관리비 회계는 고장 난 감사 시스템 때문에 짙은 안갯속,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성형주 기자

 

↑ [조선일보]

 

이런 돈 말고도 관리사무소 통장에는 이사 간 주민들이 착각해서 더 낸 관리비가 있었다. 관리비 자동이체를 해지하지 않아 들어온 돈이다. A씨는 70여 가구에 1507만7620원을 돌려준 것처럼 회계 프로그램에 기록했지만, 실상은 착복했다.

C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은 매달 관리비 결산 서류를 들여다봤지만 A씨의 횡령 사실을 적발하지 못했다. 동대표 가운데서 뽑는 아파트 감사(監事)는 기초 회계 지식이 없었다. A씨가 취직한 지 8개월 만인 작년 3월 외부 회계 법인이 아파트 회계 프로그램과 장부를 맞춰보자 A씨가 2672만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2.

 

올 초 서울 B아파트 주민들은 외부 회계감사(監査)를 받기로 했다. 입주자대표와 관리소장은 갖가지 이유를 대 미뤘다. 하지만 주민들이 들고일어나 감사를 이끌어냈다. 2년치 회계 자료를 분석하는 조건으로 회계 법인에 70만원을 주기로 했다.

 

주민들은 감사 첫날 아파트에 온 회계 법인 직원에게 "작은 문제도 지나치지 말고 제대로 감사해 달라"며 자체 조사한 내용을 건넸다. 그런데 직원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복잡한 일에 휘말리기 싫다"며 자리를 떴다. 주민들의 외부감사 시도는 이걸로 끝났다.

'고장 난 감사 시스템'도 아파트 관리비 비리를 부채질하고 있다. 아파트 주민 중 선출하는 감사는 일부 비리 입주자대표와 결탁해 눈을 감는다. 설혹 비리를 고발하고 바른 소리를 해도 '왕따'가 되기 일쑤다. 회계 관련 지식이 없는 감사는 한마디로 '봐도 모른다'. 관리비 통장 입출금만 맞춰보는 형식적인 감사를 할 수밖에 없어 '관리비 횡령'이 일어나더라도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감사원이 서울시 1258개 단지를 표본조사한 결과 매년 외부 회계감사를 받은 곳은 70개 단지(5.6%)에 불과했고, 709개 단지(56.3%)는 최근 3년간 한 차례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비용 부담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이 비용 부담을 감수하면서 회계 법인에 맡겨도 큰 소득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파트의 최고 권력자인 입주자대표 눈치를 보느라 엉터리 감사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회계 법인도 있기 때문이다. 회계사 업계에선 이런 보고서를 '붕어빵 감사 보고서'라고 부른다.

서울 강북의 한 아파트에선 재작년 처음으로 외부 회계감사를 받았다. 입주자회의가 의결했다. 비용은 40만원이 들었다. 아파트 회계감사를 하려면 서류 분석 등에만 2~3일은 걸린다. 통상 회계 법인 직원이 2명 정도 나와서 직접 영수증 등을 뒤져보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감사 보고서에는 공인회계사가 도장을 찍어야 한다. '40만원짜리 감사 보고서' 작성 과정에선 이런 과정이 상당 부분 생략됐다. 수박 겉핥기식 감사였던 것이다.

이렇게 작성된 보고서는 입주자대표와 관리소장의 '면죄부(免罪符)'로 활용됐다고 일부 주민은 말했다. 한 주민은 "회계 법인이 '적정' 의견을 낸 감사 보고서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권용찬 회계사는 "일부 부도덕한 회계 법인은 아예 관리사무소가 이메일로 보내 준 회계 자료를 통째로 붙여서 감사 보고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며 "같은 회계사로서 부끄러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붕어빵 감사 보고서'를 만들어 내는 회계 법인에도 '이유'는 있다.
다음에도 일감을 따내려면 입주자대표나 관리사무소의 신경을 거슬러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한 회계 법인 관계자는 "감사 보고서에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곧이곧대로 관리비 비리 문제를 감사 보고서에서 지적했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곤욕을 치른 회계사도 있었다. 몇 년 전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를 감사하면서 하자 보수금 14억원이 부당하게 쓰인 사실을 지적했던 회계사 K씨는 "관리소장이 주변 관리소장들이나 협회에 음해하는 바람에 한동안 아파트 회계감사 일감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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