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맡겨 키웠더니 옆집 아줌마 대하듯 해요”
“저랑 눈도 안 마주치고 손도 못 대게 해요, 엄마·아빠가 싫고 부담스럽대요.”
설 연휴인 지난 18일 박경희(여·33)씨는 아들을 맡아 기르고 있는 시댁에 갔다가 아이의 ‘엄마 기피’ 증세에 깜짝 놀랐다. 다섯살인 아들은 엄마·아빠가 다가오기만 해도 소스라치며 도망치기 바빴다. 맞벌이인 박씨 부부가 생후 4개월 된 아이를 부모님에게 맡긴 후 주말에만 만나는 생활이 4년째였다. 박씨는 “할머니가 잠시만 안 보이면 아이가 ‘엄마 싫어’하고 흐느끼고, 불안해서인지 말까지 더듬는다”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까 심각히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양가 부모나 가정 도우미에게 자녀를 맡기는 맞벌이 부부들이 아이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아이들의 양육을 맡기다시피 하는 맞벌이 부모를 아이들이 거부하는 것이다. 이루다 아동발달연구소의 현순영 소장은 “한달에 한두 번 부모 얼굴을 보는 상황이 몇 년간 이어질 때, 아이는 엄마를 낯선 사람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특히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 아동상담센터에는 이런 문제를 상의하러 온 맞벌이 부부들이 크게 늘고 있다. 유치원이나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이 돼서야 부모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가은(가명·여·38)씨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 명은이의 손을 잡고 최근 서울의 한 아동상담센터를 찾았다. 명은이는 5년간 부모와 떨어져 대구의 할머니 집에서 컸다. 이씨는 “아이가 엄마·아빠 전화도 피하더니 이젠 나를 때리고 꼬집기까지 한다”며 “맞벌이를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이라 답답할 뿐”이라고 했다.
인터넷 맞벌이 부부 카페에는 “엄마 싫다며 울고불고 하는 아들 때문에 서러워 같이 울었다”, “아이가 나를 이웃집 아줌마처럼 대한다”는 내용의 글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신의진 연대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만 3세까지 부모와 안정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학교생활에도 적응하기 어렵다”며 “지방에 아이를 맡겼더라도 자주, 그리고 규칙적으로 내려가 성의껏 놀아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2001~2005년의 5년간 대인관계에서 심각한 문제를 보이는 정서장애 어린이가 4600명에서 5870명으로 30% 가까이 늘었다. 전문가들은 맞벌이 부부의 증가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현재 맞벌이 가정의 비율은 전체의 약 44%(통계청). 2~3가구당 한 가구 꼴이다. 이중 40%가 부부 모두 주 평균 54시간 이상 일한다.
아이를 양가 부모나 친척에게도 맡길 수 없는 맞벌이 부부의 고통은 더욱 크다. 가정 도우미가 너무 자주 바뀔 경우, 심하면 아이가 자폐증세까지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육아 도우미에게 아이를 맡기는 맞벌이 부부들은 끝없는 ‘채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동갑내기 맞벌이인 성모(여·29)씨 부부도 최근 3개월간 도우미 월급을 두 번이나 올려줬다. 아이와 궁합이 맞는지 사주까지 보며 열차례 면접을 통해 결정한 도우미였다. 성씨는 “아이가 이제 겨우 아줌마한테 정이 들었는데, 걸핏하면 그만두겠다고 해 집안일도 제대로 못 시키고 눈치만 보고 있다”며 “상전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한국아동상담센터 김성은 부소장은 “나는 바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아이를 방치하는 맞벌이 부부를 최악으로 꼽았다. 심한 경우 아예 일탈행위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소영(가명·8)이는 얼마 전 저금통을 들고 6시간 동안 가출을 감행했다. 소영이는 가출 전 맞벌이인 부모에게 “회사 그만두면 안되냐” “날 또 어디에다 맡길거냐”라고 물었다. 김성은 부소장은 “부모-자식간에 제대로 관계형성을 못 한 상태에서 아이를 다그치면 관계가 계속 어긋난다”며 “부모들은 일단 멀어진 관계부터 회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남인기자 kni@chosun.com]
[박명진 인턴기자 (고려대 영문학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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