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교사 교육의원 당선…학교는 최악징계 눈앞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재단 비리의혹을 제보했다가 파면된 교사는 교육의원이 되고, 그를 쫓아낸 이사진은 재단비리 사태로 전원 쫓겨날 상황에 빠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서울시교육청은 16일 재단비리 혐의를 받는 서울 양천고를 특별감사한 결과 공사비를 횡령하는 등의 비리사실이 확인됐다며 8명의 이사 전원에 대한 취임승인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양천고 비리 의혹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6개월 전으로, 당시 이 학교에 재직 중이던 김형태(45) 서울시 교육의원에 의해서였다.

당시 김 의원은 이사장 등이 학교 공사비를 부풀리거나 허위로 동창회비를 징수하고 학교운영위원회 회의록을 조작하는 방법으로 공금 수십억 원을 횡령한 의혹이 있다며 서울시교육청에 제보했다.

그러나 시교육청 감사는 관련자 경고·주의 정도로 마무리되고 오히려 제보자 신원이 학교 측에 알려지면서 김 의원은 `비공개 문서 외부 유출' 등의 이유로 파면됐다.

김 의원은 교원소청심사를 제기해 복직 결정을 받기도 했지만, 재단은 또 다른 사유를 들어 그를 파면했다.

김 의원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지적했을 뿐이었는데…"라며 암담했던 당시의 심정을 회고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올해 6.2교육의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지역구는 양천고가 위치한 양천구, 강서구, 영등포구 등을 포함하는 제5선거구.

김 의원과 재단 이사진의 운명은 이때부터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김 의원이 당선되고 나서 시민단체의 집요한 수사 촉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서울시교육청과 검찰 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남부지검은 지난 7월 양천고에 대한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을 벌여 결국 급식대금을 빼돌려 5억7천만원을 챙긴 혐의로 이사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서울시교육청의 특별감사도 김 의원의 교육의원 당선 이후에 시작됐다.

김 의원은 "내가 교육의원이 되지 않았다면 검찰의 계좌추적도, 시교육청의 특별감사도 없었을 것"이라며 "교사가 목숨 걸고 제기하는 의혹은 제대로 듣지 않는 현실이 서글프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사필귀정이다. 양천고 비리사건이 없었다면 제가 교육의원으로 나설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며 거듭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감사결과에는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학교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뤄진 감사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많이 밝혀낸 것 같다"고 평했다.

js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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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발생한 기장군 원룸 강도사건 용의자 검거 과정에서 도움을 준

중학생과 초등학생들이 관할 경찰서장으로부터 용감한 시민상을 수상했다.

해운대경찰서는 오늘(4일) 기장중학교 3학년 15살 강민구 군과 이은수 군,

그리고 대청초등학교 6학년 12살 공태욱 군에게 용감한 시민상과 함께 부상을 수여했다.

해운대경찰서는 또 이들 3명의 학생들과 합세해 강도를 잡는 데 도움을 준 나머지 9명의

학생(중학생 7명, 초등학생 2명)에게도 부상을 수여하고 해당 교육청에 표창을 건의했다.

강 군 등 12명은 지난 1일 낮 기장군 동부리의 한 놀이터에서 함께 놀던 중 인근 원룸에

침입해 흉기를 휘둘러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담배를 훔쳐 달아나던 강도용의자

박 모(39) 씨를 뒤쫓아가 박 씨를 붙잡는 데 도움을 줬다.

부산CBS 장규석 기자 hahoi@cbs.co.kr

 

 



최근 중.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이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인터넷에 공개돼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른바 `알몸 졸업식`이 네티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교복을 찢거나 밀가루를 뿌리던 꼴불견 행태는 물론, 아예 옷을 훌렁 벗어 던진 채 남 · 여학생 가릴 것 없이 알몸으로 졸업 의식을 치른다.

특히 졸업하는 선배를 위해 재학생 후배들이 주축이 되면서 관행처럼 번지고 있다.이는 재학생들이 두 손에 가위와 밀가루, 까나리 액젓, 계란 등을 들고 졸업생들을 쫓고 있고, 이미 교복이 찢겨져 속옷이 드러난 상태로 계란을 뒤집어 쓴 졸업생들은 후배들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소화기를 분사하는 학생들은 신이난듯 보였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알몸으로 뒤풀이를 한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치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더 즐기는 듯 했다.

한편, 이같은 사진을 지켜본 네티즌들은 "우리만의 졸업식 문화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청소년들의 지나친 행동이 걱정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허리사이즈 51㎝(20인치). 소수에 불과한 개미허리를 가진 사람들의 허리둘레가 아니다. 일부 여중·고생들의 ‘보편적인’ 교복 허리사이즈다.

최근들어 적지않은 중·고교생들이 ‘꽉끼는 교복’을 선호하면서 교복 사이즈가 작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미니멀리즘 교복’에 대해 상당수 학생들이 공감하는 반면 어른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하고 있다. 상당수 학부모들은 일부 학생들이 ‘단정함·면학분위기 조성’이라는 교복의 본래 기능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는 것.

더욱이 일각에서는 이같은 교복 줄여입기 풍조가 왜곡된 외모 중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탈선을 부추기는 바로미터로 인식하고 있다.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사회적인 관심과 학부모·교사들의 적극적인 조언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도내 중고교생들에 따르면 와이셔츠, 조끼, 재킷 등을 원래보다 5∼8㎝ 정도 줄인 교복을 착용하는 학생들이 상당수다.

미니멀리즘 교복의 핵심은 상의와 하의를 짧고 작게 만드는 것. 여학생의 경우 치마까지 10∼15㎝ 짧게 줄인다는 게 학생들의 설명이다. 상의는 허리선이 드러난 채 배꼽길이로, 하의는 무릎 위까지 올라간다는 것.

이같은 미니멀리즘교복이 5~6년전부터 빠르게 퍼졌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교복업체들도 학생들의 선호도를 감안해 짧고 슬림한 교복을 출시하고 있지만, 일부 학생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작은 교복’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

이에 대해 상당수 학생들은 ‘미니멀리즘교복은 유행에 따르는 당연한 흐름’이라는 반응이다. 전주시내 한 고교에 다니는 전모양(17)은 “작은 교복이 활동하기에 불편하지만 예뻐보이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면서 “학급에서 절반 이상은 교복을 줄여 입는다”고 말했다. 전양은 또 “학교측은 학칙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꽉끼는 교복을 금지하고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입어볼 수 있겠는가”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기성세대의 경우 ‘교복이라 할 수 없는 옷차림’에 대해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 사실. 고1 딸과 중3 아들을 둔 주부 정모씨(40·완주군 봉동읍)는 “일부 중고생들은 단추가 잠궈지지 않을 정도로 교복을 줄여입는다”면서 “이같은 추세가 단순한 유행에 그치지 않고 탈선으로 가는 비상구로 전락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제휴사/ 전북일보 이세명(dalsupia@jjan.co.kr) 기자

 “집 밖 외출은 초등 1학년때가 마지막이었네요”
▲ 사진=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최보식 기자의 직격인터뷰] 40년간 방안에만 지낸 카투니스트 지현곤씨 “생애 첫 작품전도 안갔어요 대·소변 문제… 마지막 존엄성 지키고파” “2m×3m 작은 방에 남쪽으로 난 窓이 있었더라면 달보며 공상할텐데…” "글 어떻게 배웠냐고요? 보이는 대로 다 읽었네요"

 

 

 

 

한마디로 내게’너는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것 같군요. 정말 냉정하네요.”

2m×3m의 좁은 방에서 그는 상체를 모로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척추결핵으로 뼈와 살이 말라붙은 하체는 담요 속으로 숨었다. 머리맡에는 펜과 연필들이 담긴 통, 잉크, 화판, 작업중 통증을 완화해줄 물파스가 놓여있었다.

방 안에서 40년 동안을 엎드려 지내온 만화가 지현곤(46)씨는“살아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많은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굵은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그전에 찾아오신 분들은 제가 장애인이라서 단순히 동정심으로 대했는데, 오늘 질문은 감당이 안 되네요. 보통 사람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거나 자기의 부(富), 출세, 명예를 위해서 뭐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염세(厭世)와 어두움이 있었지요. 그 돌파구가 카툰(cartoon: 한컷짜리 풍자만화)이 됐던 거네요. 물론 이것을 목표로 삼았던 적은 없었어요. 은연중에 물방울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그냥 물 흐르는 대로 가다 보니까, 종착역이 만화가 되지 않았나 싶거든요.”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는 그의 생애 첫 카툰 작품전이 열리는데, 그는 마산의 경남대학교 정문 옆 골목으로 들어간 후미진 주택 2층 단칸방에서 엎드려 있는 것이다. 평자(評者)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이 이 경지에 오른 것은 불가사의”라고 말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끝이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는 방에서만 지내왔다.

“그때 방학이 되니까 허리에 신경마비가 와서, 칠팔십 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힘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냥 개인의 불행이지 사회의 책임이나 의무는 없을 때지요. 다들 먹고살기 바쁜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된 아이가 달리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동생을 시켜 만화방에서 만화를 빌려보면서 그걸 따라서 끼적거렸네요. 사람이라는 게 친숙한 것에 익숙해지지 않습니까. 그 이상의 것은 없고요. 배운 것도 없어요. 제게 철학이 어떻고 전문적인 걸 원한다면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면 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네요.”



방 안은 더웠다. 그는 하얀 스틱으로 툭 쳐서 선풍기의 풍력조절을 ‘미풍’에서 ‘약풍’으로 맞추었다.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일상 행동이 들켰다는 생각 때문인지, “실례인 줄 알지만”이라며 웃었다.

―이렇게 엎드려서 늘 꿈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상을 많이 하지요. 희한하게도 꿈을 꿔도 만화처럼 앞뒤가 안 맞는 꿈만 꾸게 돼요. 그걸 딱히 뭐라고 말하기가 그러네요.”

―내가 움직였으면 좋겠다, 세상의 거리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은 꾸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황우석 그분의 방법으로 치료될 수 있지 않으냐고 하셨는데, 그건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지요. 가수 강원래라는 분처럼 신체가 건강하다가 갑자기 다친 분들에게는 기적 같은 치료법이 있다면 단번에 털고 일어날지도 모르죠. 제 경우는 하체가 40년 동안 고철로 있었어요. 살점이 없어 뼈와 가죽이 그냥 하나처럼 붙어 있어요. 그런 상태에서 신경이 돌아온다고 멀쩡하게 걸어다닐 수 있겠습니까. 걸어다니는 그런 공상은 어렸을 때라면 모르겠는데 이미 정리가 된 거네요. 만약 이렇지 않았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그런 물음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만약이 현실로 된다면 만약을 꿈꿀 수 있지만, 제게는 만약이 현실로 될 수 없는 거네요.”

―모든 꿈과 욕망을 체념한 건가요?

“굳이 따지면 늙은 노모가 40년 넘게 해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는 것으로부터 독립을 했으면 하는 마음은 있네요. 지금보다 좀 더 넓은 방에서 지냈으면 하는 현실적인 꿈은 있어요. 이 방도 처음에는 더 작았으나 조금 늘린 것이거든요. 많이 나아졌는데도, 사람이 늙어가니 답답증이 생기네요.”

그는 열린 방문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가리켰다.

“처음 저 건물이 지어질 때,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제 시야를 가리니까 싫었어요. 하지만 제가 싫다고 해서 올라갈 건물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고요. 그러려니 했는데, 어느 날부터 그 건물이 동경의 대상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큰 집도 아니니까, 제가 욕심 내도 너무 심한 것은 아니다 싶고요. 방이 좀 더 넓으면 이리저리 뒹굴면서 몸에 힘이라도 키우겠는데…. 제가 사는 집은 북동향이지요. ‘남쪽으로 난 창(窓)이 있으면 일 년 내내 달을 바라볼 수 있겠구나’라는 바람도 있어요. 겨울에만 이쪽 방향으로 달이 떠요. 하지만 남쪽으로 창이 나있으면 봄 여름 가을까지 달을 볼 수가 있어요. 달이 낮게 뜨면서 남쪽을 지나가거든요.”



―하필 달이 왜 보고 싶습니까?

“글쎄요. 해는 눈이 부셔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도시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기도 힘들고요.”

나는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방문을 쳐다봤다. 그가 엎드려서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뚝 선 아파트와 창공의 달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달을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

“만월이었다가 줄어들고 없어지고, 그런 달의 변화를 보면 제 생활에 변화가 없어서인지 좋더라고요. 일반 사람들은 웬만한 관심을 가져도 달을 보고서 ‘아, 좋다’고 하는 이는 드물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대 일상에 평범한 게 다른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평범한 것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지난 겨울에는 만화 그리는 일을 멈추고 그냥 방문을 열어 놓고 밤새 달만 쳐다봤어요. 이 방문을 통해서는 겨울에만 달이 보이니까요. 마냥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요.”

그는 간신히 몸을 틀어 상자 속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 카메라 액정 속에는 달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망원렌즈가 없어, 쌍안경을 구해가지고 카메라렌즈에 연결해 찍었네요. 수십억, 수백억원을 들여서 하늘에 떠있는 달에 며칠간 머무는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저도 만약 그런 금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꼭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집 밖 외출을 해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지요. 국립 마산 결핵병원 부설 저소득층 수용 병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몇 달 입원해있다가 온 적이 있었지요. 그때 운전하시는 분이 마산 시내를 한 바퀴 빙 돌더라고요.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서 같이 먹고요. 왜 그러냐 했더니, 그때는 잘 몰랐는데,’이 분들이 내가 앞으로 바깥 출입이 어려울 것 같으니까 마지막으로 시내를 보여준 거구나’라고 깨닫게 됐네요.”

―40년 동안 방 안에서만 있었으니 지금 바깥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TV가 얼마간 사실을 왜곡하고 순화를 해도, 그래도 세상 모습을 알려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만 접하니, 제가 그리는 만화도 정확한 사실을 묘사하지는 못해요. 제가 만화공모전에 여러 차례 입상을 하니, 어떤 신문사에서 만평을 그려달라고 제안이 왔어요. 현장에 갈 수 없는 제가 그걸 담당할 수 없지요. 제 한계를 제가 알거든요.”

방문 왼쪽에 낡은 12인치 TV가 대각선으로 놓여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필요해서 TV를 틀어놓아요. 다른 사람은 일상에서 안 볼 때는 끄지만 제 경우에는 안 봐도 켜놓아요. 어느 순간 연예인들이 나오는 프로나 드라마는 잘 안 봐요. 그런 걸 보는 까닭은 대리충족 때문인데, 제게는 전혀 다가오지 않아요. 해와 달, 별, 우주창조 같은 다큐멘터리가 나오면 꼭 보네요. 일부러 녹화까지 해서 보관하는 것도 있고요.”

―이번 작품전에 주인공인 당신을 모셔가려고 주최 측에서 휠체어와 차까지 준비를 했는데, 끝까지 이 골방 안에서 버텼지요. 서울 구경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욕망이 없었습니까?

“그러기에는 최소한의 내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었어요. 젊은 사람들이면 그게 가능하겠는데, 나이 든 늙은 사람의 고집을 꺾기는 쉽지 않아요.”

한 살 연상인 내가 “늙은 사람의 고집이라…”라고 중얼거리니, 그는 “마흔일곱이 무슨 나이가 많으냐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라고 했다가, “그게 제 한계일거예요”라고 덧붙였다.



 

―무슨 한계를 말하는 겁니까?

“외부에 대한 공황장애일 수도 있고, 공포증일 수도 있겠네요. 방 안에서 늘 혼자 살아왔으니까요. 어쩌면 온실에 갇힌 화초일 수도 있고요. 이번 행사 때 제가 와주면 몇 백%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못 가는 이유가 대 소변 문제 때문입니다. 수십 년간 제 혼자 힘으로 그걸 해결해왔어요.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고 싶거나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참 별나다. 까다로운 성격이네’ 하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제가 바꿀 수가 없네요. 그건 제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거든요.

방 안에 화장실이 딸려 있어 씻는 것도 제가 씻어요. 머리도 제 손으로 깎아요. 제 머리가 짧은 이유는 취향이 그래서가 아니라, 신장이 안 좋으면 몸 속에서 열이 생겨 머리가 조금만 자라도 머릿속이 화끈거려 제 스스로 밀어버려요. 앞부분은 그런대로 깎지만, 뒷부분은 깎고 나면 오톨도톨합니다.”

―육체적으로 멀쩡한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뉴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요?

“정신적으로 고통이 있고 피폐해져서 그런 면이 있겠지만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나, 육체가 성한 사람들이 자살할 때, 저는 그 육체가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에게는 그런 육체조차 염원의 대상이잖아요. 장애인들은 옥상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려고 해도, 그렇게 올라갈 힘이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엎드려 작업을 하면, 무엇이 가장 불편합니까?

“처음 물파스를 어디다 쓰느냐고 물으셨는데, 이렇게 엎드려 목 부위를 딱 세우고 있으면 쉽게 관절통이 오거든요. 늘 약을 먹어도 온 전신 마디마디가 아프지요. 그래서 제 작업량이 한 달에 카툰 두 장을 그리면 많이 그립니다. 펜으로 가는 선을 빡빡하게 집어넣어 그리는 작업이기도 하지만요. 다른 사람들은 갖가지 도구나 방법을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 표현을 합니다만, 저는 좁은 방에서 십수 년 동안 펜과 연필로만 그려왔거든요. 그전까지는 사람도 찾아오지 않으니 종일 이것만 하다가 졸리면 자곤 했어요. 제가 그린 카툰이 공모전 대회에서 몇 번 입상을 하니 기자들이 찾아왔어요. 처음에는 방어적이었고 좀 두렵기도 했어요.”

―하루 종일 아무 대화상대가 없을 때도 있습니까?

“칠순이 넘은 노모가 계시지만 늘 혼자 있거든요. 조카 애들이 놀러 올 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지요. 어렸을 때는 ‘삼촌, 삼촌’하면서 따르던 아이들이 머리가 크니까, 또 자기 생활이 있으니까 저를 안 쳐다보는 일상이 돼버렸어요. 가족들도 하나같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거든요. 그런 것에 연민이 들고, 그러면서 무심한 가족들에 대한 서운함도 있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이런 것에 대해 신경을 안 쓰네요.”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느냐’며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감당했지요?

“운명에 대한 분노도 솔직히 힘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네요. 어렸을 때는 그랬죠. 왜 내가 여기 있어야 되느냐고, 다른 아이들은 학교 가고 소풍 가는데 왜 나만 여기서 가만히 누워있어야 하냐고, 그런 생각은 분명히 있었죠. 그 분노를 삭이는 방법으로서 만화가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죠.

옛날 어른들 말씀대로 ‘내버려두라, 나이 들면 철든다’라고. 그렇게 세월이 가면서 저 자신을 추스르게 되더라고요. 분노를 표출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미성숙한 인격체의 표현이지요. 어느 순간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제 삶이 왜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게 했느냐고. 제가 어머님께 짐이 되고 있는 그 이유 때문에 제 분노를 굳이 표현하지 않고 모든 걸 자제하고 제 내면에 감춰 두어요. 제가 배우지 못했지만 최소한의 인격은 형성 되었다고 느껴지거든요. 가끔 자다가 깨어나 저 자신을 향한 분노가 솟구칠 때도 있지만, 그것은 화산은 화산인데 김 빠진 화산처럼 잠깐 연기를 뿜었다가 그대로 사그라지죠.”

―곁에 같이 있어주는 여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없습니까?

“타인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두렵기도 해요. 제가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TV를 보면 연예인들이 ‘저희 결혼했어요. 잘 먹고 잘 살아요’라고 며칠 혹은 몇 달 간격으로 나오거든요. 그걸 보고 ‘참, 샘나네. 정말 잘 사네’라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한 순간에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느니 해요. 이는 인간적으로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죠. 그런 면에서 저는 제 자신이 과연 성숙했는가,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한 그런 여건과 정신적 성숙이 되어 있는가, 그런 것을 묻는다면 도저히 ‘예’라고는 말할 자신이 없네요.”

―초등학교 교육도 못 받고 그 뒤로 쭉 방안에서 혼자 지내왔는데, 어떻게 이런 언어를 구사하는지 솔직히 놀랍습니다.

“더 이상 물으면 제가 말문이 막히는데, 굳이 말을 하자면, 어릴 때 그림은 이해가 되는데 글은 제가 모르겠어요. 글까지 안다면 그림을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글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어요. 제가 똑똑했더라면 초등학교 1학기 다닐 동안 글을 깨우칠 수도 있겠는데. 요즘에는 대부분 글을 깨우치고 초등학교 입학을 합니다만. 누가 그 당시에 저를 위해서 글을 깨우쳐 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욕망 때문에 글이 보이더라고요. 이건 ‘낫 놓고 기역’이고, 저건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글이 술술 읽혀지더라고요. 그러면서 눈에 띄는 모든 책을 읽었지요. 그때 나이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제 시대 때의 소설과 대하소설, 외국소설도 읽은 기억이 나요. 바깥에 나갈 수가 없으니까 어떻게든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그런 식으로 습득을 해나갔지요.

진정 미쳐버리거나 완전히 바보가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는데. 저는 미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냥 단순한 사람도 아닌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그게 말씀하신 대로 저의 운명의 한 형체가 되어버리는 거죠. 어느 정도는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요.”

―먹는 욕망은 강하지 않나요?

“제가 신장이 아주 안 좋아요. 단백질 음식을 섭취하면 신장이 거기서 걸러가지고 몸 속으로 영양소로 보내야 하는데, 그것을 보내지 못하고 연한 쌀뜨물처럼 흘러 보냅니다. 가만히 누워지내는 생활로 인한 후유증일 수도 있는데, 하루에 두 끼를 못 먹어요. 지금도 배가 고프지만 음식을 참아요. 먹고 나면 결과가 안 좋으니까요. 욕망을 따라가면 고통이 있으니, 그걸 알고 있으면, 욕망을 참을 줄 알아요.”

―현재 밥벌이는 됩니까?

“지금까지 수입이 없어요. 작품전을 열어준 분들이 오늘 서울서 내려오셔서 ‘꾸미지 말고 자신의 처지를 말해 사회 각계에 도움을 받는 쪽으로 해보자’고 하네요. 우리 사회에 먹고살기 힘든 사람이 저보다 많다는 것쯤은 저도 인지하고 있는데, 그러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부모한테 과자 사달라고 보채는 게 아닌가 그러네요.”

―앞으로 무엇이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 모르네요. 계속 만화를 그려야지요.”

인터뷰가 끝난 뒤 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하자,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망원경, 값싼 걸로”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을 자책했고, “이 말은 안 들었던 걸로 정말 해달라.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라는 것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좁은 방문을 열어놓고 그는 망원경으로 좋아하는 달을 보고 싶은 것이다.

 

 

 

▲ 지현곤의 카툰 '맛보기'… 병사의 철모 위에 핀 꽃으로 군인들의 시선이 쏠린다. 물을 부어주는 병사의 눈빛에 작가의 마음이 담겼다.

지현곤씨는 

 

생애 첫 작품전을 여는 카투니스트 지현곤(46)씨는 1961년 8월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척추결핵에 걸려 이후 40년간 방안에서만 지냈다.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이 이 경지에 오른 것은 불가사의”라는 평(評)을 받는다. 다음은 그의 주요 수상 경력.

▲1991년 5월 제3회 주간만화 신인만화 공모전 카툰 부분 가작

▲1995년 8월 제5회 국제서울만화전 대상·입선

▲1996년 12월 제3회 96운평만화대상 카툰 부분 우수상

▲2001년 9월 제10회 대전국제만화대상전 공로상

▲2006년 제15회 대전국제만화영상전 우수작가상


 

 

속시원한 뉴스풀이"Why"

 

⊙ "집 밖 외출은 초등 1년때가 마지막이었네요"


⊙ 한국 공군 전투기, 왜 자꾸 떨어지지?


⊙ 백악기 폭발때 공룡들이 한반도에 몰려들었다는데…


⊙ '대통령 암살'·'달착륙 조작' 뒤에는 거대한 음모?


⊙ 한국의 '차 문화' 발달이 안된건 '물'이 좋아서?


1급 신체장애로 40여년간 집에서 칩거하며 외롭게 작품 세계를 펼쳐온 카툰작가 지현곤씨의 마산 집에서의 작업 모습과 인터뷰./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제공


[최보식 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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