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서울 강남 학부모들이 헬리콥터맘을 넘어서 매니저맘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슈퍼맘'을 요구하는 현실이 숨어 있다. 아이들의 학교 숙제를 도와주고 이를 제대로 '접수'시키려면 수학, 영어 실력은 기본이고 녹음, 파일 변환, 파일 등록 등 컴퓨터 관련 지식까지 '빠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초등학교 문제 맞아?
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를 둔 A(40) 씨는 최근 딸이 산수 문제를 도와 달라고 해서 자신 있게 책상에 앉았다. 공부를 그리 잘한 편은 아니었지만 '초등학생 문제쯤이야'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쉬운 문제도 몇 개 있었지만 너무나 어려운 문제가 줄줄이 이어졌던 것. 일부 문제는 방정식을 동원해서야 간신히 풀 수 있을 정도였고 손도 못 댈 문제까지 있었다.
문제를 간신히 풀어냈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초등학생인 딸아이가 해낸 숙제인 만큼 아이가 '이해'를 해야 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려면 '방정식' 개념도 가르쳐야 하는 데다, 방정식 냄새가 나지 않도록 포장까지 새로 해야 할 판이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A 씨는 아이 숙제를 위해 과외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공부를 봐주는 B(45) 씨는 아예 영어회화 수업을 다니고 있다. 학교 숙제 중 영어책을 읽고 녹음해 가야 하는 수업이 있는데 자신의 '구식'발음으로 가르쳤다가는 아들이 망신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B 씨는 "우리 때는 문장 해석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어 문법과 독해에만 치중했었는데 아들 숙제 때문에 회화수업에 다녀야 한다"며 웃었다.
▶ '논문은 족보라도 있지…' 무서운 체험학습
체험학습만큼 학부모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숙제도 없다. 관찰일기, 박물관 탐방 등 주제도 다양하거니와 사진 자료에 각종 데이터까지 찾아봐야 할 게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맞벌이라도 하는 부모에게는 귀중한 휴식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박물관으로, 야외로 뛰어나가야 하는 또 하나의 '숙제'로 다가온다. 특히 주제가 따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 체험학습 '아이템'을 기획해 아이를 데려가야 하니 스트레스가 더 심해진다는 게 맞벌이 부모들의 속내다. 부산의 해운대학부모교육원에서는 학부모를 위한 체험학습 연수 프로그램을 따로 운영할 정도다.
C모(38) 씨는 "방학이 되면 자유체험학습 숙제를 한두 개는 해 가야 하는데 이만큼 걱정되는 것도 없다"며 "지역 도서관 등에서 체험학습을 해결해 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대기자가 밀려 접수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탄했다.
▶ 녹음하랴 올리랴. 숙제해 주다 보니 '엄마는 IT전문가'
결혼 전만해도 전자기기에는 학을 뗐던 B 씨, 하지만 이젠 IT 도사가 다됐다. 영어회화 수업을 다녀온 B 씨는 아이에게 저녁식사를 차려준 후 영어 발음을 연습시킨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헤드세트를 씌우고 아이패드와 연결해 아이의 영어숙제를 녹음한다. 이후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나면 돌아오는 남편 저녁을 차려준 후 아이패드를 이용, 녹음된 파일을 편집하고 파일 형식을 변환해 학교 숙제게시판에 접속, 파일 업로드까지 마친다. 중간중간마다 돌아온 남편의 저녁 챙기랴 집안일 하랴 하다 보면 자정까지 작업이 계속될 때도 있다.
B 씨도 처음부터 아이패드에 능숙했던 것은 아니다. 녹음하는 법을 몰라 몇 시간 동안 아이와 씨름한 적도 있고 기껏 녹음한 파일을 편집하다 날려 버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젊은 엄마'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과일에 주스를 접대해 가며 편집법을 배웠다는 그는 "애 숙제 해주는 게 학력고사 치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다"고 웃었다.
김재현 기자/madpen@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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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고교에서 고3 담임을 맡고 있는 ㄱ 교사는 최근 학부모로부터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록한 종합의견을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 반면 자치활동이나 청소 등 교과 외 활동에는 소홀한 자녀에 대해 ㄱ 교사가 '학교생활에는 소극적이나 성실히 자신의 진로 개척에 힘쓴다'고 기록했는데, '소극적'이라는 표현이 입시에서 감점 요인이 될 수 있으니 고쳐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ㄱ 교사는 "단호하게 거절하기는 했지만 이런 요구가 자주 들어와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2012학년도 대입 수시모집 원서 접수가 한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입학사정관제 등 서류 평가 비중이 높은 전형을 준비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담임교사에게 학생부의 평가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늘고 있다.
고3 담임인 ㄴ 교사는 학부모가 원하는 대로 학생부를 기록하지 않았다가 항의를 받았다. 한 학부모가 학기 초에 학급 시간표를 꾸민 학생의 활동을 '진로희망사항' 항목에 기재해달라고 요청했는데 ㄴ 교사가 '창의적 체험활동' 항목에 기록하자, 학부모가 이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ㄴ 교사는 "미술로 서울대 특기자 전형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는데 진로희망사항에 들어가는 게 더 유리했던 모양"이라며 "'평가는 교사 권한'이라고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지난 2006년 9월부터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과 연동된 'NEIS 학부모 서비스'가 시작됨에 따라, 학부모들은 자녀의 학생부 기재 상황을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뒤늦게 봉사활동이나 수상경력 등 학생부의 비교과 항목을 추가해달라고 요구하는 학부모도 있다. 경기도 한 고교의 고3 담임인 ㄷ 교사는 "고1 때 봉사활동한 증명서를 갖고 와서 학생부에 기록해달라고 요구하는데 급조한 흔적이 역력했다"며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기록을 안 해줬는데 교장한테 항의를 하는 바람에 나만 곤욕을 치렀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고교 교사는 "학부모가 '이렇게 기록해달라'고 아예 문구를 적어서 건네주는 경우도 있다"며 "학부모들도 입학사정관제 확대 등으로 학생부가 중요해졌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2월 '학생부 작성 및 관리 지침'을 개정해 한 학년이 종료된 이후에 학생부 내용을 고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으며, 정정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변경 사항을 기록한 대장을 만드는 등의 엄격한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그러나 학기 중에 교사가 이미 작성한 학생부 내용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정을 두지 않고 있어, 교사가 학부모의 무리한 요구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동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지부 성남지회 사무국장은 "학부모들이 한 학년이 끝나면 학생부를 고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미리 수정을 하려고 한다"며 "학기 중 정정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제한하지 않으면, '치맛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학생부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